깨달음에 관심있는 분들과의 소통을 위한 공간입니다. 무심선원에서 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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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그 자신이 깊은 잠에 들어있었지만 자각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자던 사람이 지금의 사람과 다르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자기가 있을 뿐입니다. 
그 자기는 항상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변입니다. 
진아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질 : 아스트랄체가 무엇입니까? 

마 : 그대는 꿈 속에서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그 몸과 다르지 않습니까? 

질 : 죽은 뒤에도 우리가 존재합니까? 아스트랄체는 육신의 죽음 뒤에도 살아남습니까? 

마 : 꿈속에서도 그대가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한 뒤에 깨어나듯이, 육신의 죽음 뒤에도 다른 몸을 얻게 됩니다. 

질 : 죽고 난 뒤에도 아스트랄체는 40년 동안 살아 있다고 합니다. 

마 : 현재의 몸 안에서 그대는 꿈의 몸이 아스트랄체라고 말합니다. 그 꿈의 몸 안에서도 그렇게 말했습니까? 지금 아스트랄체인 것이 꿈 속에서는 실재하듯이 보이겠지만, 현재의 몸 자체도 꿈의 관점에서 보면 아스트랄체입니다. 이 아스트랄체와 저 아스트랄체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 둘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질 : 실재성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 : 꿈의 몸은 지금 실재하지 않고 이 몸은 꿈 속에서 실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실재성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몸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항상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인데, 그것이 진아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153-154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30 2016/10/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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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기 안에 있습니다. 
세계가 있고 그 안에 하나의 육신이 있으며 자신이 그 육신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진리를 알게 되면 우주와 그 너머의 것이 자기 안에 있을 뿐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127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9 2016/10/1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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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존재하는 의식을 깨달았을 때에만 그것이 영구적입니다. 의식은 실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합니다. 누구나 '내가 있다'는 것을 알지요. 누구도 자기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깊은 잠이 든 사람은 의식이 없지만 깨어 있을 때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잠자던 사람과 지금 깨어 있는 사람 사이에 바뀐 것은 없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자신의 몸을 자각하지 못했고, 따라서 몸-의식이 없었습니다. 생시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몸을 자각하므로 몸-의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차이는 몸-의식이 일어났다는데 있지, 진정한 의식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몸과 몸-의식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가라앉습니다. 결국 깊은 잠 속에서는 아무 한계가 없으나 깨어 있을 때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계가 바로 속박입니다. '몸이 나다'라는 것이 착각입니다. 이 거짓된 '나'라는 느낌이 사라져야 합니다. 진정한 '나'는 항상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새로 나타나지도 않고 다시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새로 나타나는 것은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깊은 잠과 생시를 비교해 보십시요. 생시에는 몸이 나타나지만 잠들었을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몸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몸보다 먼저 있었고, 몸이 사라진 뒤에도 남을 것입니다. 사실 '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몸이다'라는 그릇된 앎이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이 그릇된 앎이 사라져야 합니다.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새로운 어떤 것을 얻는 것도 아니고, 새로 생겨난 능력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위장물을 제거해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115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8 2016/10/1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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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끊어짐 없는 전체가 그 자신을 '나'로 자각합니다. 
이 '나'가 그것의 원래 이름입니다. 

'나'는 항상 체험되는 것이지만, 사람의 주의가 거기에 쏠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知)가 밝아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112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7 2016/10/1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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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짐이 없는 '나, 나'는 무한한 대양입니다. 
에고, 즉 '나'라는 생각은 그 위의 한 물거품일 뿐이며 개아, 곧 개인적 영혼이라 불립니다. 
그 물거품도 물입니다. 
그것이 터지면 대양에 섞여 버리니까요. 
그것이 물거품으로 남아 있을 때에도 역시 대양의 일부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112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6 2016/10/16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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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우리가 자신을 유한한 형상을 가진 존재로 생각하는 한에서만 존재합니다. 그 형상을 초월하면 우리는 하나의 진아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도 없고 탄생도 없습니다. 태어난 것은 몸일 뿐이고, 몸은 에고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에고는 몸 없이는 보통 지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고는 항상 몸과 동일시됩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자기에게 몸이 있는 줄 알았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생시의 상태에서는 왜 몸을 느낍니까? 그러나 잠 속에서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깊은 잠이 들었을 때 그는 어떻게 있었습니까? 깨어있을 때는 어떻게 있습니까?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고가 일어나면 그것이 생시입니다. 동시에 생각들도 일어납니다. 그더러 생각들이 누구에게 있는지 발견하라 하십시요. 그 생각들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그것은 의식하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희미하게라도 이해하는 것이 에고를 소멸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의 무한한 존재를 깨닫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 상태에서는 개인이 전혀 없고 영원한 존재만이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 죽었다는 생각도 없고, 비통해 할 일도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죽음의 공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자신이 과연 태어났는지, 즉, 자기에게 탄생이 있는지 발견하라 하십시요. 그러면 자기는 항상 존재하며, 태어나는 몸은 생각 속으로 흡수된다는 것,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모든 해악의 뿌리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찾아보십시요. 그러면 그대는 항상 존재하는 가장 깊은 내면의 진아 안에 안주하게 될 것이고, 태어났다는 생각이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104-105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5 2016/10/16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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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예를 들어봅시다. 
스크린 위를 움직이는 영상들이 있습니다. 
가서 그것을 붙잡아 보십시요. 
무엇이 잡힙니까? 
스크린 뿐입니다. 
그 영상들을 사라지게 해 보십시요. 
그러면 무엇이 남습니까? 
다시 스크린이 남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나타날 때에도 그것이 누구에게 나타나는지 보십시요. 
'나'라는 바탕을 붙드십시요. 
그 바탕을 붙들고 나면, 세계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그것이 중요하겠습니까?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94-95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4 2016/10/16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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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일시적인 죽음이고, 죽음은 긴 잠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잠을 통해서 매일) 죽는다면, 남들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이 있든 없든 우리의 존재는 생시나 꿈이나 잠 속에서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왜 육체적 속박이 지속되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죽지 않는 진아를 발견하고 (진정으로) 죽어서, 불멸을 얻고 행복해지라 하십시요.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94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1 2016/10/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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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어, 자신이 다른 읍에 가 있는 꿈을 꿉니다. 그 장면은 (꿈 속의) 그대에게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몸은 여기 침대 위에 그대로 있습니다. 한 읍이 그대의 방에 들어올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대가 몸뚱이는 여기 놓아두고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습니까? 둘 다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그대가 여기 있다거나 다른 읍을 본다는 그 두 가지가 다 실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에게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입니다. 꿈의 '나'는 곧 사라지고, 다른 '나'가 그 꿈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나'는 그 꿈 속에서는 없었습니다. 두 가지 '나'가 모두 실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지속되는 마음의 바탕이 있는데, 이것이 그토록 많은 장면들을 만들어냅니다. 각각의 생각과 함께 하나의 '나'가 일어나고, 그 생각이 사라짐과 함께 그 '나'도 사라집니다. 매순간 많은 '나'가 태어나고 죽습니다. 존속하는 그 마음이 정말 문제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72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0 2016/10/16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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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의식이 있는데, 그것은 생시, 꿈, 잠의 상태에서도 지속됩니다. 잠 속에서는 '나'가 없습니다. '나'라는 생각은 생시에 일어나며, 이 때 세계가 나타납니다. 잠 속에서는 이 '나'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것도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그대가 지금 느끼는 식으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나는 '나'라는 생각일 뿐이지만, 잠잘 때의 '나'는 진정한 '나'입니다. 그것은 항상 지속됩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알면, 그것은 생각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67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18 2016/10/16 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