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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끊어짐 없는 전체가 그 자신을 '나'로 자각합니다. 
이 '나'가 그것의 원래 이름입니다. 

'나'는 항상 체험되는 것이지만, 사람의 주의가 거기에 쏠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知)가 밝아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112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7 2016/10/1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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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짐이 없는 '나, 나'는 무한한 대양입니다. 
에고, 즉 '나'라는 생각은 그 위의 한 물거품일 뿐이며 개아, 곧 개인적 영혼이라 불립니다. 
그 물거품도 물입니다. 
그것이 터지면 대양에 섞여 버리니까요. 
그것이 물거품으로 남아 있을 때에도 역시 대양의 일부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112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6 2016/10/16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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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우리가 자신을 유한한 형상을 가진 존재로 생각하는 한에서만 존재합니다. 그 형상을 초월하면 우리는 하나의 진아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도 없고 탄생도 없습니다. 태어난 것은 몸일 뿐이고, 몸은 에고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에고는 몸 없이는 보통 지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고는 항상 몸과 동일시됩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자기에게 몸이 있는 줄 알았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생시의 상태에서는 왜 몸을 느낍니까? 그러나 잠 속에서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깊은 잠이 들었을 때 그는 어떻게 있었습니까? 깨어있을 때는 어떻게 있습니까?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고가 일어나면 그것이 생시입니다. 동시에 생각들도 일어납니다. 그더러 생각들이 누구에게 있는지 발견하라 하십시요. 그 생각들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그것은 의식하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희미하게라도 이해하는 것이 에고를 소멸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의 무한한 존재를 깨닫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 상태에서는 개인이 전혀 없고 영원한 존재만이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 죽었다는 생각도 없고, 비통해 할 일도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죽음의 공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자신이 과연 태어났는지, 즉, 자기에게 탄생이 있는지 발견하라 하십시요. 그러면 자기는 항상 존재하며, 태어나는 몸은 생각 속으로 흡수된다는 것,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모든 해악의 뿌리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찾아보십시요. 그러면 그대는 항상 존재하는 가장 깊은 내면의 진아 안에 안주하게 될 것이고, 태어났다는 생각이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104-105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5 2016/10/16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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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예를 들어봅시다. 
스크린 위를 움직이는 영상들이 있습니다. 
가서 그것을 붙잡아 보십시요. 
무엇이 잡힙니까? 
스크린 뿐입니다. 
그 영상들을 사라지게 해 보십시요. 
그러면 무엇이 남습니까? 
다시 스크린이 남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나타날 때에도 그것이 누구에게 나타나는지 보십시요. 
'나'라는 바탕을 붙드십시요. 
그 바탕을 붙들고 나면, 세계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그것이 중요하겠습니까?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94-95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4 2016/10/16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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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일시적인 죽음이고, 죽음은 긴 잠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잠을 통해서 매일) 죽는다면, 남들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이 있든 없든 우리의 존재는 생시나 꿈이나 잠 속에서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왜 육체적 속박이 지속되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죽지 않는 진아를 발견하고 (진정으로) 죽어서, 불멸을 얻고 행복해지라 하십시요.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94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1 2016/10/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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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어, 자신이 다른 읍에 가 있는 꿈을 꿉니다. 그 장면은 (꿈 속의) 그대에게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몸은 여기 침대 위에 그대로 있습니다. 한 읍이 그대의 방에 들어올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대가 몸뚱이는 여기 놓아두고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습니까? 둘 다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그대가 여기 있다거나 다른 읍을 본다는 그 두 가지가 다 실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에게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입니다. 꿈의 '나'는 곧 사라지고, 다른 '나'가 그 꿈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나'는 그 꿈 속에서는 없었습니다. 두 가지 '나'가 모두 실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지속되는 마음의 바탕이 있는데, 이것이 그토록 많은 장면들을 만들어냅니다. 각각의 생각과 함께 하나의 '나'가 일어나고, 그 생각이 사라짐과 함께 그 '나'도 사라집니다. 매순간 많은 '나'가 태어나고 죽습니다. 존속하는 그 마음이 정말 문제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72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20 2016/10/16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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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의식이 있는데, 그것은 생시, 꿈, 잠의 상태에서도 지속됩니다. 잠 속에서는 '나'가 없습니다. '나'라는 생각은 생시에 일어나며, 이 때 세계가 나타납니다. 잠 속에서는 이 '나'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것도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그대가 지금 느끼는 식으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나는 '나'라는 생각일 뿐이지만, 잠잘 때의 '나'는 진정한 '나'입니다. 그것은 항상 지속됩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알면, 그것은 생각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와의 대담 / 67쪽 / 라마나 마하리쉬 / 탐구사>

2016/10/16 08:18 2016/10/16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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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개체적 영혼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각하는 마음이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는 사실이다 . 마음은 어떠한 상태, 어떠한 차원에 있든 거기에 맞는 체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즉, 물질 세게에서는 물질적 육체를, 꿈의 세계에서는 꿈의 체를 만들어내는데, 이 꿈 속에서의 체는 꿈 속에서 비가 오면 젖고 꿈 속에서 병이 들면 아파한다. 물질적 육체가 죽으면 마음은 일정 기간 동안 마치 꿈 없는 수면 상태에서처럼 정지하는데, 그때에는 물질 세계도 없고 육체도 없다. 그러나 곧 다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체 (아스트랄 세계에서의 아스트랄 체)를 받아 활동하게 되며, 그러다가 다시 물질적 육체를 받아 재생한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사라져 버린 깨달은 사람은 죽음에 의해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사라겨 버리기때문에, 다시 생겨나서 탄생과 죽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는 환상의 고리가 영원히 풀어져 버린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탄생도 죽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탄생과 죽음이 실재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게속 유지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며, 이는 깨달음에 의해서 완전히 사라진다.

 

<나는 누구인가 / 227-228쪽 / 라마나마하리쉬>

2016/10/11 11:26 2016/10/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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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이 영원하고 무소부재한 브라흐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을 육체와 잘못 동일시하면서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현상계가 실재하지 않으며, 환상일 뿐이라고 상기시켜 주어야한다. 종이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종이 위에 씌어진 글씨를 볼 뿐, 아무도 종이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글씨가 씌어 있건, 씌어 있지 않건, 종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글씨를 실체로 보는 사람에게는 글씨는 종이에 의존하고 있기때문에 실체가 아니고 환상이라고 말해 줘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종이와 글씨, 즉 브라흐만과 우주를 하나로 본다.

 

<나는 누구인가 / 217쪽 / 라마나마하리쉬>

2016/10/11 11:19 2016/10/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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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 두려움이 그대를 사로잡는 때는 언제인가? 그대가 자신의 육체를 보지 못할때, 즉, 깊이 잠든 상태에서 그 두려움을 느끼는가? 그 두려움이 그대를 사로잡는 때는 그대가 완전히 깨어있으면서 그대의 육체를 포함한 이 현상계를 지각하고 있을 때뿐이다. 만약 그대가 깊이 잠든 때처럼 이 현상계를 지각하지 못하고 순수한 진아로서 남아있다면 어떠한 두려움도 그대를 건드릴 수 없다.

 

그대는 무엇을 잃을까봐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무언인가? 그것을 추적해보면 그대는 그것이 육체가 아니라 육체 안에서 작용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각성상태가 계속 유지되기만 한다면, 자신의 병든 육체와 거기에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점, 또는 불편한 점들을 기꺼이 포기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육체가 아니라 각성상태이며  의식이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곧 각성상태를 의미하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진아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순수한 각성 상태를 얻지는 못하는가? 그리하여 왜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가?

 

< 나는 누구인가 / 라마나마하리쉬 / 204쪽>

2016/10/11 11:13 2016/10/11 11:13